조현대: <나(Me)>. 작품명이 참 간략합니다. 전통적인 회화 장르 구분에서의 자화상이라는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이 간단한 작명의 이유가 있을지요?
이은우: 우선 저의 ‘스킬 자수(Latch Hook)’ 작업을 소개해야겠네요. <나(Me)>를 비롯한 일련의 스킬 자수 작업은 저의 입체작업과는 달리 매우 즉흥적이고 장식적입니다. 작업실 구석에 널브러진 낙서를 확대한 <위기의 주부들>, 스프레이 페인트로 아무렇게나 물결무늬를 그린 <지렁이 무늬>처럼요. <나>는 40cm 지름의 원에 작은 원과 타원을 배치해 언뜻 얼굴을 연상시키지만, 처음부터 얼굴이 되기를 의도했다기보다 드로잉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모양입니다. 2020년 스페이스이수에서 열린 《궤도 공명(Welcome Back)》에서 처음 <나>를 전시했을 때, 작품과 제가 닮았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아마 얼굴 생김새의 특징이라기보단, 어딘가 당황스러워하는 익살스러운 표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 전시에서는 나무나 석고 같은 재료로 만든 작은 오브제들과 함께 <이것 저것>의 일부로 전시되었고, 2021년 개인전 《쌍》에서 <나>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쌍》은 사물의 질서에서 가짜와 진짜, 장식과 실용 같은 수직적/대립적 위계질서를 삭제했을 때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전시였습니다. 언뜻, 물질에 대한 사회학적, 정치적 접근으로만 보이지만 다분히 저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윤리가 되어버린 가성비의 세계와 몰개성적 프랜차이즈의 천국이 되어버린 수도권 신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게 있어서 무언가 뾰족하게 드러나는 정체성이란 건 없는 것 같았어요. 저를 둘러싼 모든 게 이것과 저것 사이에 걸쳐 있거나, 아예 아무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이 ‘혼란스럽고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으로 꽉 차있는 상황’ 자체가 제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늘 대립해왔던 진짜와 가짜가 ‘진짜 vs 가짜’에서 ‘진짜 and 가짜’로 바뀐 거죠. 이 ‘and’의 상황에서, 저는 작업으로 ‘나’를 드러내는 게 중요했어요. 그래서 <나>는 <나>가 되었습니다.
조현대: 두 작품을 제작하시게 된 동기 혹은 계기가 있나요? 어떤 시리즈의 연속선상, 파생이라면 해당 시리즈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주세요.
이은우: <나>를 포함한 스킬 자수 작품은 다른 작업들과 다르게 쉬운 노동일 것, 값이 쌀 것, 장식적이길 바랬습니다. 2014년 갤러리팩토리 개인전 《물건 방식》에서 선보였던 물 위에 다양한 색깔의 유성 잉크를 뿌린 후 종이로 찍어낸 마블링 시리즈가 그랬습니다.
조현대: 이러한 조건을 선제한 이유가 있다면요?
이은우: 쉬운 것, 평범한 것,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제가 어떤 ‘평범함’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제 작업이 어떤 조형의 질서에 머무르거나, 역사적 맥락에서만 읽히는(그러니까 ‘보통’ 미술을 읽는 방식) 것이 무척 어색하고 때로는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건 저의 애매한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미술이 몇 개의 키워드나 일반 언어로 납작하게 회귀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또, 저에게는 의외로 특별한 것, 고급스러운 것, 이쁜 것, 어려운 것들에 대한 반항이나 양가감정같은 게 있습니다.
조현대: 그렇다면 이렇게 '즉흥적이고, 장식적인' <나>, '쉽고, 값싸게' 제작된 평범한 <나>가 가장 적합하게 구매, 소비, 장식될만한 장소, 인물, 방법 등이 있다면 어디, 누구,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시장과 작업실을 떠난 <나>의 미래를 그려본다면요?
이은우 글쎄요. 전 아직까지 미술제도의 바깥에서 제 작업이 어떻게 소비될지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긴 합니다. 누군가의 거실이나 침실, 사무 공간에 걸릴 텐데 그런 개인적인 장소에 저를 가리키는 <나>가 걸려 있으면 흥미롭긴 하겠네요.
조현대: 개인적인 서사, 동기도 많이 흥미롭습니다. 가성비의 세계와 몰개성적 프랜차이즈의 천국이라, 저와 우리 모두 그런 재화와 서비스에 익숙해져 있다 못해, 그걸로도 충분한 '만족'을 얻어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고 할까요. 또 한국의 문화예술 ‘상품’의 생산 방식도 여기에 최적화된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K-팝과 K-드라마요. 미술 내적인 이야기로 들어오자면, 모 평론가는 한국 회화의 특징으로 이러한 ‘혼종성’을 들기도 했어요. 저는 이 언사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딱히 역사와 전통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작업해도 되는 한국 미술계 특유의 상황을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판단으로는, 작가님께서도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으로 꽉 차 있는 상황”, 곧 ‘혼종성’을 정체성으로 찾아내신 것도 같고요.
이은우: ‘혼종성’이란 비평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 미술이 역사와 전통을 의식하지 않고 작업해도 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예술은 결국 전통에 기대 있는 거니까요. 마치 현대의 클래식 음악이 끊임없이 고전을 재해석하듯, 미술도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국적과 출신을 떠나, 모든 미술과 미술가는 자신의 전통에 기대어 있는 거니까요. 저의 애매한 정체성 역시 제가 스스로 규정한 저의 전통입니다.
조현대: 작품을 감상하는 데 함께 보면 좋을 만한 책, 영화, 음악 혹은 다른 미술작품 등이 있다면요?
이은우: ‘감상’하는 데 좋을 만한 책, 영화, 음악을 고르는 건 ‘감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읽습니다. 얼마 전엔 앤디 위어의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알에이치코리아, 2021)를 읽었고, 요즘은 『세스 프라이스 개새끼』(작업실유령, 2021)를 읽고 있어요. 다음엔 찰스 부코우스키의 『우체국』(열린책들, 2012)을 읽으려 합니다.
조현대: <드로잉>의 제목은 더욱 간단합니다. 말 그대로는 ‘그린 것 혹은 그리기’, 미술용어로서는 색채보다는 ‘선’의 요소로 형태를 그려낸 회화 장르를 일컫습니다.
이은우: 제목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제목 없음>이라고 불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현대: 작품의 동기는요?
이은우: <드로잉>은 원래 입체로 제작하려 했던 아이디어에요. 나무 무늬 시트지를 붙인 판재를 여럿 캐스팅해, 같은 모양의 나뭇결이 반복되며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보려 했는데, 제작비 문제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2015년 작업
전 입체작업을 하기 때문에 늘 형태를 실현하는 현실적 상황에 부딪히곤 하는데 드로잉 안에선 모든 것이 자유롭기 때문에 그걸 즐깁니다. 적어도 종이 위에선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우니까요.
조현대: 초기작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요. 김재석의 작가론에서 2011~12년경 작업의 텍스트에 대해 “나는 더는 지루한 미술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향학열을 고취하겠다”라는 의지의 선언으로 간주했습니다. 작업의 큰 변곡점이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당시의 변화, 그 이유와 의지를 말씀해주시겠어요?
이은우: <나(Me)>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평범함’에 천착해온 제가 미술을 한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꽤나 모순적인 상황이기도 합니다. 좀 부조리 같다고나 할까요. 왜냐하면 미술제도는 끊임없이 ‘작가’를 호출하고, 작가인 저는 ‘One of Them’으로 남고자 하는 욕구가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이런 저에게 있어 작업을 통해 ‘나’, 자의식, 자율성, 자의성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건 당시로선 무척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2011~12년은 제가 막 30대에 들어서는 무렵이었어요. 그전까지 의도하지 않게 적지 않은 수의 전시를 치르며, 저절로 작가가 된 상황에서 저와 제 진로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제 작업은 리서치 기반, 사회정치적 맥락과 가깝게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운동권이나 정치적 좌파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일반 교양 차원에서 사회 과학 서적을 읽곤 했지만요. 동시에 미술 작업으로 사회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 대한 짙은 냉소와 허무함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더 이상 ‘말’로만 표현되는 미술을 하고 싶지 않았고, 보다 나 자신에 천착하거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영역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고로 “우리에게 향학열을 고취한 게 누구냐!”는 향학열을 고취하겠다는 의지가 아닌, 그만 좀 하겠다는 뜻이었어요.
조현대: 작업의 프로세스 중 디자이너적, 업자적인 태도가 강조됩니다. 동시대미술에서 더 이상 ‘작업실에서 고독히 붓을 든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은우: 이전엔 주로 디자이너/업자 역할을 맡아 ‘데스크 잡’을 주로 했지만, 올해 개인전 《쌍》에서 나온 작업 대부분은 제가 직접 제작한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작업과 전시를 쉬면서 우연히 목공을 배웠는데 저의 ‘노가다꾼’ 정체성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육체 노동에는 어느 정도의 기만이 있긴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제가 좋으면 됐죠. 아무튼 현재의 저는, 저를 ‘작업실에서 고독히 붓을 든 미술가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업자형 혹은 스튜디오형 작가는 아마 자기 인식의 차이 때문이겠지요. 당시 제게는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 전형적인 ‘시티 걸’”이라는 생각, 또 육체노동에 대한 모종의 경시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뇌와 손가락만 굴리는 생활 방식이 영 재미가 없고, 번뇌만 가득 차다보니, 우연히 찾게 된 다른 것이 목공이었습니다. 대부분 작가들이 손으로 뭘 그리고 만드는 것에 대한 재미로 미술을 시작했을 텐데 전 모든 면에서 어째 거꾸로 가는 것도 같아요.
조현대: 이번엔 작업을 하면서 보셨던 영화나 음악을 여쭈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은우: 영화는 아무거나 봅니다. 작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땐, 주로 좀비나 고어영화를 봅니다. 몇 년에 한 번씩 꼭 보는 게 있다면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유스>(2016)가 생각나네요. 은퇴한 마에스트로에 대한 이야기인데, 볼 때마다 공감대가 달라지는 게 흥미롭습니다. 음악은 정말 트로트를 말곤 닥치는 대로 듣는 편이에요. 작년엔 리차드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메타모르포젠 (Metamorphosen)>(1945)과 김트리오의 <그대여 안녕히>(1980)를 자주 들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제게 작업에 구체적인 ‘영감’을 주지는 않지만 늘 뭔가를 하게 만들기는 합니다. 물론 시간을 때우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때론 ‘아드레날린 부스터’ 같은 역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