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Two to Twin
Enna Bae
I witnessed different manifestations of Eunu Lee: at first, she was a student and a journalist; then an artist as well as a registrar; she was a director and a curator at times; a producer and a designer at others. Of course, inevitable episodes and events must have taken place along the way, where she had to take up certain roles out of irrevocable necessities. One day, this variety of Eunu Lee appeared to me as a singular life––onto the margins of the blabby and troubled world, her objects were put as unique shapes, seamlessly reinforced in their own places. This motivated me to witness her as an artist anew.
The objects created by Lee intrigue me each time I encounter them, especially when they throw a sinister glimpse toward something. It was only recently as I could vaguely grasp it, that this gaze to the world corresponds to her own. Nevertheless, the sense of déjà vu was neither out of the blue nor uncomfortable, but rather pleasant. I came to understand also recently, that this was because I’ve been enjoying such audacious gaze in my own way. Moreover, particularly through my recent frequenting of her studio, I came to consider the world of her manufactured objects as an ‘intimate society’ of things that are very well ‘aware’ of what they are.
From a certain point, contemporary art has been regarded as decoration dedicated to aestheticized egoism or commercialism unless it implies or participates in sociopolitical solidarity, which troubled many artists. When the artwork in the exhibition space couldn’t justify which subject it conveys, what it indicates conceptually or which message of the time it mediates, it was quickly summarized in simple exclamations that it is “beautiful,” “interesting,” or “idiosyncratic.” In line with it, in the advent and dissipation of major and minor vogues that inundated contemporary art––such as large-scaled and customized public art, installations for prominent international exhibitions, performance as artistic practice and activist or collective art under the banner of political correctness––Lee proclaims negations articulated as “no,” “it might not be” and “it might or might not be,” that balance between audacity and caution. “This might appear sociopolitical, but it isn’t.” “This is not design.” “This might not be a sculpture.” “I wish it was not furniture.” “This might or might not be craft.” “This was almost an homage to minimalism.” “This isn’t necessarily a complete negation to the nostalgia of Russian constructivism.” And so forth.
We are surrounded by a diversity of materials that derived from our demand for cost efficiency and practical values. Like how we are more adapted to buy at convenience stores than marketplaces by now, we prefer MDF over timber, synthetic rock over real stone and printed adhesive sheets over brickwork. Or rather, it became easier to appreciate the former. From the account of a consumer, the convenience that such materials provide as things in wicked disguise has become an irresistible precondition. In contrast, what Lee brings about in her exhibition Pairs is the autonomous life of things that are faced with the cowardly condition of materials as such. Indeed, from a user’s perspective, the easiest way to define objects would be to simply distinguish them as specific items, like breaking them down into categories of chairs, tables, partitions or decorations. But what if an object had its own way and attitude of managing life? Like how we cannot define people by their lineage or occupation without considering their environment and method of living?
Every object requires its own process of manufacture. Lee is a producer mediating things to such processes as well as a consumer of materials. Her productive and consumptive activities are accomplished based on calculations of utmost meticulousness and fair distribution, where any emotional superiority or sensory inferiority is elaborately suppressed. Whereas her peculiar sense of disapproval persists along the way, a certain change is remarkable in her recent practice. While Lee’s pursuit of ‘the mundane’ in the past derived from her awareness of working against ‘exclusivity,’ in her recent work, it shifted to an ethical attitude which is significant to keep as a kind of ‘self-reference.’ Such transition is apparent in her choice of learning carpentry and usage of timber. Embracing not only synthetic material that is meant to be self-sufficient but also natural material that requires one to stay loyal to its sensitive property, laborious production by manufacturers and even whimsical handicraft, Lee decomposes the vertical and symmetrical hierarchy of ‘singles’ and presents them as ‘pairs’ of equal match.
To demand for ‘uselessness’ from objects that are destined to neatly sit in the intellectual locus of a museum could be more complicated than urging for ‘usefulness.’ Even more so, when their materials indicate ‘meaningfulness’ in disguise of ‘meaninglessness.’ It would be less complicated to ruthlessly use plastic, yet Lee deliberately chooses stone and wood. She trims the uneven surface of timber and manually shaves it off to achieve a smooth contour; I assume the laborious time and possible abrasion of her cartilage as she cut bunches of yarn into short segments, to tie them one by one onto a netted mat; it is astonishing to observe the versatility and earnestness of the adhesive sheet in its sleek finish which even neatly reproduces the embossed surface of the wood pattern. MDF, finely cut into pieces, stack to form cuboids in repetition, each just about the size of a brick; boasting of its abstract sculpturality as if to reminisce Henry Moore’s oeuvre. On the unfolded gallery plan with precisely listed positions and captions of works, we can find two entrances to the exhibition. When we confront them in space, one entrance is open, while the other is shut. A corridor connects them, not revealing whether its neutral position indicates the inside or the outside. This aspect maintains a certain level of ‘justice,’ reluctant to be absorbed into the ‘intimacy’ created by the objects yet not giving in to any ‘deceit’ either––straight or duplicitous, they exist as ‘pairs,’ rather than ‘singles.’
‘짝’에서 ‘쌍’으로
배은아
나는 여러 이은우를 만났다. 학생이며 기자였고, 작가이며 레지스트라였다. 한때는 디렉터이자 기획자였고, 간혹 제작자이자 디자이너기도 했다. 물론, 그 사이사이 피치 못할 사연과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저런 필요에 따른 부득이한 역할 노릇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여러 이은우가 하나의 삶으로 다가왔는데, 말 많고 탈 많은 세상의 언저리에서 그의 사물은 빈틈없게 단련된 하나의 형상으로 자기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것이 그를 한 작가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은우가 만들어내는 사물들은 매번 나를 함정에 빠뜨리고는 한다. 그것도 어딘가 냉소적으로 빤히 보고 있는데. 이 시선이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것을 어슴푸레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럼에도 아주 생뚱맞거나 불편하지만은 않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기분 좋기도 했는데. 이 또한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 짓궂은 시선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만드는 사물의 세계가 ‘자기-파악’이 매우 잘 된 사물들을 위한 ‘친밀한 사회’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또한 최근 그의 작업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시작되었다.
언젠가부터 현대미술은 사회정치적 연대나 참여 혹은 함의를 담지 못하면, 탐미적 이기주의나 상업주의 장식품으로 치부되면서, 여러 작가들을 곤란에 빠뜨리던 때가 있었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이 어떤 주제를 담고 있는지, 개념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하는지가 설명되지 않으면, ‘예쁘다’, ‘재밌네’,
혹은 ‘특이하네’와 같은 감탄사로 뭉뚱그려 마무리되고는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미술계를 휩쓸고 지나간 공공 프로젝트를 위한 대형 커스터마이징, 명망 높은 글로벌 기획전의 설치 프로젝트, 퍼포먼스의 예술적 수행력, 활동가 혹은 콜렉티브가 주장하는 정치적 올바름 등등 크고작은유행의등장과소멸속에서이은우는‘아니다’혹은‘아닐수 있다’혹은‘때로는그렇지만때로는아닐수있다’와같은대범한건지 소심한 건지 모를 부정을 선언을 한다. 이것은 사회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것은 디자인이 아니다. 이것은 조각이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가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공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미니멀리즘의 오마주가 될 뻔했다. 이것은 러시아 구성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전혀 아닌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가성비와 실용성에 의해 태어난 다양한 재료들이 있다. 시장보다 편의점에 더 익숙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목보다는 합판에, 진짜 돌보다는 플라스틱 바위에, 벽돌보다는 시트지에 더 관대하다. 아니 더 손쉽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재료의 편의성은 사물의 고약한 눈가림으로 포장되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이 된다. 이은우가 이번 전시 ‹쌍 (PAIRS)›에서 들고 오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재료의 비겁한 조건들을 마주하는 사물들의 독자적인 삶이다. 사실, 사물을 정의할 때 사용자의 입장에서 단순 품목으로 구분하는 것은 가장 손쉬운 일이다. 예를 들면 의자류, 탁자류, 파티션류 혹은 장식품류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사물에게도 나름의 살아온 방식과 삶을 꾸려나가는 태도가 있다면? 마치 살아온 환경과 생활방식을 무시한 채 한 사람을 혈통이나 직업으로 구분할 수 없듯이 말이다.
모든 사물들은 나름의 공정을 거쳐서 제작된다. 이은우는 이 과정을 중계하는 사물의 생산자이자 재료의 소비자이다. 그의 생산과 소비 활동은 최대한 정확한 계산과 공정한 분배를 통해 완성하려고 하며, 어떤 감정적 우월함이나 감각적 열등함은 애써 참아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삐죽거림 속에 최근 어떤 변화가 생겼다. 이은우가 추구했던 ‘평범함’이 과거에는 ‘고급스러움’에 반발하는 자의식에서 출발했다면, 최근의 ‘평범함’은 일종의 ‘자기-참조’로서 지켜야 하는 윤리적 태도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이동은 목공 배우기와 원목 다루기의 출연과 함께 두드러진다. 자신에게 충실할 수밖에 없는 합성재료뿐만 아니라 비위를 맞추고 충성해야 하는 천연재료들, 그리고 성실한 공장제작뿐만 아니라 변덕스러운 수공예까지 받아들이면서 이은우는 사물의 수직적/대칭적 위계 질서의 ‘짝’을 떼어내서 상호 동등한 ‘쌍’으로 다시 내놓는다.
미술관이라는 지성의 장소에 조신하게 앉아있어야 하는 사물에게 ‘쓸모없음’을 재촉하는 것은 ‘쓸모 있음’을 요구하는 것 보다 더 피곤한 일이다. 더욱이 그 재료들이 ‘의미 없음’으로 무장한 ‘의미 있음’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차라리 돌과 나무를 버리고, 플라스틱으로 나쁜 짓을 하는 편이 수월할 텐데, 이은우는 그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원목의 결을 고르고, 손으로 대패질을 하며, 매끈한 선을 완성한다. 한 뭉치 털실을 짧게 자르고 매트에 올려 한 땀 한 땀 매듭을 지었을 노동의 시간과 연골의 소모를 미루어 짐작해 본다. 성실하게 표면을 마무리하고 게다가 평면의 양각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는 나무 무늬 시트지의 쓸모와 성실함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촘촘하게 자르고 세워진 합판은 벽돌이 들어갈 만한 크기를 허락하고, 헨리 무어의 추상 조각을 연상시키려는 모양새로 허세를 떤다. 작품의 위치와 캡션까지 꼼꼼하게 표시된 전시도면을 펼치면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두 개의 입구가 보인다. 각각의 다른입구는하나는열린태도로다른하나는밀폐된형태로관객을 맞이한다.그사이를잇는복도는내부인지외부인지알수없는중립 지점을 지키는데, 이는 마치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친밀함’에 포섭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고약함’은 허락하지 않는 듯 모종의 ‘정당함’을 유지한다. 바로 보나 거꾸로 보나 이들은 ‘짝’이 아닌 ‘쌍’으로 존재한다.